참 오묘한 영화다. 과격하게 표현하는데 눈물이 나는. 포스터만 보고 아기자기한 영화를 상상했다가 호되게 심장이 놀랐다. 이 영화를 두 가지 시각에서 볼 수 있을 것 같다. 대중적인 연민과 더불어 현실 세계의 영악함에 대한 깨달음.
이 영화에서 시대적 상황을 가장 잘 반영한 순간은, 주인공 '수남'이 현실에 대한 안내를 받지 못하고 경주마처럼 달려가는 동안 세상은 변했고 자신의 모든 기술이 쓸모 없어져, 결국 컴퓨터에 대체되던 장면이 아닐까. 그리고 이것은 영화에서만이 아니라 지금도 진행중인 상황이다.
*스포 있음
영화에서는 지금의 6070세대의 젊은 날에 해당되는 시대를 보여준다. 그 시절 중학교만 졸업하거나, 고등학교까지 진학하거나의 상황에서 고등학교를 진학하는 것은 '엘리트'가 되는 것을 의미했다. 수남은 나름대로 엘리트의 길을 걸은 셈이다. 물론 학자가 되는 길을 걸은 것은 아니지만, 가장 평범한 중산층의 삶을 꾸려나갈 수 있을것이라 기대하고 상고에 진학한 것이다. 그리고 열심히 했다. 한길만을 보면서 열심히. 상도 받고 인정도 받으면서. 기술을 익히면 굶어죽지 않는다는 사회적 신념이 강하던 시절이다.
수남은 귀가 들리지 않는 상태가 된 남자친구에게 인공와우 수술을 권하고 그것으로 남자친구는 후유증을 겪는다. 후유증은 또 다른 사고를 부르고 손가락이 잘리고 결국 자살에 이른다. 수남은 남편(=남자친구)을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 매일 열심히 일하고 대출을 해 집을 산다. 식물인간이 된 남편의 병원비는 감당할 수 없이 커지고 재개발이라는 유혹이 수남을 흔든다. 이 모든 불행은 아주 작은 데서부터 시작되어 나비효과처럼 번져간다. 이런 상황을 누가 예측할 수 있었을까. 그저 수남은 그 순간 순간의 상황에 맞는 최선의 선택을 내렸다. 그 시절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선택을 하면서 살아갔다. 깊게 생각하고 수 많은 선택지에 대한 장점과 단점을 늘어놓고 선택할 여유가 없었다. 그들에겐 '열심히'라는 선택지밖에는 없다. 그리고 문제가 생기면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현실적인 상황을 늘어놓고 그 중 한가지를 해결하면 될 거라 여긴다. 그 외의 다른 것을 누군가가 알려주거나 생각할 상상조차 그들은 하지 못한다.
작은 선택이 큰 불길처럼 문제를 일으킬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한 댓가는 삶을 완전히 잡아먹어버린다. 순수하고 순진하기만 하던 한 사람의 인생은 결국 내 행복을 방해하는 자를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제거할 수 있는 '사이코패스'가 되면서 막을 내린다. 실제로 지금 범죄를 저지르거나 분노에 가득차서 자신이 얻어야 할 성취에 대해서만 생각하는 사람은 수남과 같은 어떤 순간의 선택들이 모여서 현재를 만들어내지 않았을까. 수남의 인생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녀가 정말 나쁜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녀의 인생에 연민을 보내고 안타까움이 생긴다. 이 영화는 자신도 모르게 싸이코가 되어가는 사람의 인생에는 어떤 작은 순간들이 모여 있는지를 확대해서 보여준다.
수남은 '사회가 정해준 신념'에 열심히 따라간 사람이다. 사회에서 말하는 수 많은 편견들과 현실과 맞지 않는 신념들로 똘똘 뭉친 무언가가 있다면 바로 수남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신념이라는 것은 이러하다.
- 기술을 배우면 잘 살 수 있어
- 의사가 하는 말을 잘 듣고 권하는 것에 따르면 더 좋아져.
- 열심히 일하면 부자가 되.
- 내 가족은 결코 쉽게 포기할 수 없어.
- 사랑이란 포기하지 않는거야.
- 순정은 중요해
- 자신의 행복에 방해되는 자들은 당해도 싸.
- 누군가 마음이 아프고 우울증에 걸리면 그가 예전에 말한 꿈을 이루어주면 행복해질 거야.
- 사회에서 권하는 교육시스템을 따라가면 엘리트가 되.
등
등
수 없이 많다.
안타깝게도 여전히 이러한 신념들 대부분에 기대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스스로 경험을 통해 터득하며 신념을 수정해나가지 않고 그저 사회가 말하는 것을 따른다. 그러면 정말로 달콤한 열매가 주어지리라고 믿는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예전에는 그랬는데 현대에는 통하지 않는걸까? 저 중 몇가지는 이해가 안되지만, 나머지는 맞다고 생각하는가? 이 신념을 조금 적으면서 느낀 바는, 사회가 세뇌시킨 신념으로 망가진 시민들이 너무 많다는 점이다. 그리고 가장 큰 피해를 보는 사람들은 영악하지 못한 사람, 순수하고 순진한 사람,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고 정직한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아마 이런 점 때문에 이 영화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을 표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공감하고 단순히 '착하고 순수한' 순남이 통쾌한 복수를 한 것으로 이 영화의 가치가 다했을까?
이 영화의 가치는 보여준 것 이상으로 상상해볼 수 있다는 가능성이 많다는 점이다. 영화 안에서의 완결성보다는 영화 밖에서 이야기 나눌 지점이 아주 많다.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는 자신이 하는 선택과 좁은 세계관이 어떻게 삶을 데려가는지를 매우 잘 보여준다. 또한 나의 윗세대가 저지르는 꼰대문화와 불통, 비합리성, 편협함 등이 어떻게 형성되어 왔는지를 이해해보는데 도움이 된다. 수남은 여성으로 그려지지만 사실 수남이 남성이라고 하면 또 다른 시각이 보일 것이다. 여성이기 때문에 이 영화는 예술적으로 더 공감을 이끌어 낼 수 있었다. 하지만 남성이었다면 윗 세대가 저지르는 모든 잘못을 총합해서 보여주는 것과 같은 기분이 들 것이다. 살면서 이런 꼰대를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축하한다. 당신은 0.1%에 해당하는 행운아이다. 그러나 대부분은 이런 불통과 경주마같은 성실성과 분노로 뒤덮힌 윗세대를 주위에 두었을 것이다.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당신의 삶 또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늪으로 끌려 들어간다.
하지만 그들의 삶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게 된다면 미움이 연민으로 바뀌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가 수남을 아는 것처럼. 지금 불통인 그 사람도 어쩌면 수남같은 인생의 여정 속에서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젊은 날에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을 지도 모르고 그로 인해 점점 왜곡되어가는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리기보다는 감정이 이끄는 대로 삶을 이어나갔을 것이다. 그들은 각자가 지켜야 하는 것에 대해서'만' 생각없이 최선을 다한다.
특히 그 모습을 가장 잘 보여준 장면이 바로 청년부장으로 임명된 세탁소 주인과 수남이 고문 당하는 장면이다.
청년부장은 어수룩해보이는 사람이지만 자신이 가야할 길에 방해가 되는 것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행동한다. 그는 자신이 어떤 일을 저지르는지 '생각'하기 보다는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 착한 아들이었을 것이고 좋은 남편이 될 지도 모를 그 사람은, 자신에게 부여받은 일에 최선을 다하기 위해 수남을 다리미로 고문하고 세탁기에 집어넣는 등 어쩌면 인간이 가장 잔인해질 수 있는 모든 면모를 가감없이 보여주었다. 아마 수남 역시 자신의 목적을 위해 (병원에 가서 남편을 돌보는) 그를 죽이지 않았다면 그는 재개발에 대한 소식에 따라 더 잔인한 짓들을 저질렀을 것이다. 그런데 수남 역시 이 청년부장과 같다. 자신에게 주입된 어떤 정보 ㅡ 병원에 가야 한다, 남편을 돌보아야 한다 ㅡ 같은 것이 자신을 자극하면 상대방을 잔인하게 죽일 수 있다. 그리고 같은 방식으로 보복한다.
'의심하고 생각해보지 않고 최선만을 다하는' 사람들은 서로를 죽이지만, 사실 그들을 조종하는 것은 말로서 그 사람들의 욕망과 두려움을 자극하는 사람들이다. 수남이 안타까운 것은 조종당하는지 모르고 조종당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시민들은 수남처럼 조종당하는 줄 모르면서 조종당한다.
이를 더 확대해서 생각해보면,
종교, 정치적 신념 같은 것에 매수된 사람들이 세상에서 가장 잔인해질 수 있지만, 사실 그전에 그들은 누구보다 선량한 시민이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어떤 신념이 그들을 데려가는냐에 따라, 무장단체가 될 수 있고 공포정치를 합리화 할 수 있으며, 테러를 일으키는 범죄자가 될 수도 있다. 반면 그들은 비폭력주의자가 될 수 있고, 봉사활동에 기여할 수도 있으며, 환경보호운동가가 될 수도 있다. 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다른 사람들일까?
그렇지 않다.
이들을 조종하는 단체의 신념이 그들을 전혀 다른 인격체로 만들어나간다. 그 역할을 작게는 가정에서, 모임에서 할 것이고 더 크게는 국가와 세계단체에서 한다. 우리는 수남을 보면서 그녀가 당한 것을 되갚아 주는 '보복의 통쾌함'에 매료될 것이 아니라, 무엇이 그녀를 그렇게 만드는지를 면밀히 살펴봐야 한다. 그녀가 되갚아주는 상대방은 당신이 될 수도 있고, 수남은 나의 적이 될 수도 있다.
개봉일: 2015년
감독: 안국진
촬영: 이석준
수상: 백상예술대상 시나리오상,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
출연진:
이정현 (수 남)
서영화 (경 숙)
이준혁 (형 석)
명계남 (도 철)
'작은 우주의 이야기 > 컨텐츠 파헤치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미영] 위대한 개츠비(The Great Gatsby) (0) | 2021.03.06 |
---|---|
[미영] 러브, 어게인(Home, Again) (0) | 2021.03.05 |
[한드] 연애의 발견 3 (1) | 2021.02.22 |
[한드] 연애의 발견 2 (0) | 2021.02.22 |
[한드] 연애의 발견 1 - 유형분석(MBTI) (0) | 2021.02.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