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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탐구하는 모든 것이 결국 당신만의 길로 이끌 것이다."

작은 우주의 이야기/컨텐츠 파헤치기

[한드] 그 겨울, 바람이 분다

플라눌라 planula 2021. 2. 14. 0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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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한번, 참 잘지었다. 

 

드라마를 다 보고 나서 든 소감이었다. 제목 속에 감정의 희노애락이 숨어있다. 개인적으로는 이 드라마를 통해 처음으로 조인성이라는 배우를 알게 된 것 같다. 그가 이 역할에 참 잘맞지 않았나 싶으면서.

 

*스포 있음

 

 


7

오수가 처음으로 내면을 치유받는 순간

 

그럼 오수얘기 해줘.

그 사람 수자는 무슨 수야? 너처럼 지킬 수? 아님 빼어날 수?

말해주는 게 좋을 걸. 아님 잠 못자게 밤새 들들 볶을 거니까.

 

나무 수. 어릴 때 엄마가 나무밑에 버렸대. 그래서 나무 수 .

 

그럼 그 사람은 엄마 얼굴을 한번도 못봤겠네?

 

봤대. 10몇살땐가. 학교앞에 불쑥 나타나 오만 팔천원을 주고갔대지 아마? 그게 전부.

 

안됐다.

그래서 그 사람은 마음의 상처 때문에 사기꾼이 됐나?

 

핑계좋네. 그 놈은 원래 그런놈이야. 태생부터 쓰레기같은 놈이지.

 

사랑하는 사람은 있었나?

 

한때는.

근데 여자가 자기 애를 가졌다고 한 순간 야멸차게 뒤도 안돌아보고 여잘 버렸대. 그러다 그놈을 뒤따라오던 여자가 그만 사고로

그게 그 사람 몇살때야?

 

열 아홉. 여자도 그놈도. 열 아홉. 나도 한때 너처럼 부모한테 쓰레기처럼 버려진 그놈이 쓰레기처럼 살고 싶어 하는걸 이해하고 동정한 적도 있어. 하지만 그런놈을 사랑해서 집을 버리고 학교 포기하고 자기 애까지 가진 여잘 책임지지 못한 건 용서할 수 없는 일이야.

 

니가 뭔데 그 사람을 용서해.

사람이 사람한테 해줄 수 있는건 용서가 아니라 위로야.

내가 처음 뇌종양에 걸렸을 때 내가 바란것도 위로였어. 근데 사람들은 오빠 너처럼 위로하지 않았어. 위로는 커녕 여섯살 아이한테 용기를 강요했어. 잔인하게. 괜찮아, 영이야. 수술은 안무서울거야. 괜찮아. 넌 이길 수 있어. 항암치료? 그까짓거 별거 아니야.

 

그럼 사람들이 그 말밖에 무슨말을 더 할 수 있겠어.

 

안 괜찮아도 돼. 영이야. 안 괜찮아도 돼. 무서워해도 돼. 울어도 돼. . 만약 사람들이 그렇게 말했다면 난 하루이틀 울다가 괜찮아 졌을거야. 근데 그때 못울어서 그런가. 지금두 난 여섯살 그때만 생각하면 자꾸 눈물이 나. 그 사람두 나같지 않았을까. 기억두 못할 나이에 나무밑에 버려졌는데 어쩌다 나타난 엄만 고작 오만 팔천원을 주고 떠났는데 그것도 모자라 세상에서 유일하게 사랑한 여잘, 열 아홉살의 나이에 영원히 잃어버렸는데 아무한테도 위로받지 못했잖아.

 

그래도 아일 책임지지 못한건 잘못이야.

 

잘못이야. 아주 큰 잘못. 하지만 그 사람은 자기도 책임질 수 없는 열 아홉이었어. 그 나이에 자기 인생을 꼭 빼닮을것 같은 아이는 많이 무서웠을 거야.

실수한 거야. .

난 니덕분에 오늘 그 사람이 더 궁금해졌거든.

 


 

 

 

이 장면은 정말 명대사였다!

 

이 드라마의 핵심적인 메세지를 함축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자기 자신을 혐오하고 죄책감에 쌓인 사람에게 누군가가 다가와서 처음으로 '네 잘못이 아니야. 너도 어쩔 수 없었어. 그래도 잘살았어.' 같은 말을 해줄 때, 하나의 우주는 새로 태어난다.

 

타인에게 상처준 것을 너무 쉽게 잊는 사람은 인간성이 결여되어있다는 반증이지만, 사실 이런 경우는 소수에 속한다(고 믿고 싶다). 죄를 잊지 않아야 할 가해자는 쉽게 잘못을 잊어버리고, 오히려 자기 혐오에서 벗어나 자신을 사랑해야 할 선한 사람들은 그곳에서 잘 벗어나지 못한다. 그럴 때 주위에 친구, 지인, 가족이 해줄 수 있는 역할이 바로 그 사람을 그 죄책감의 구덩이에서 꺼내주는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가 그 일을 해줄 때 대부분은 상대방에게 무한한 사랑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베푼 사랑은 더 크게 돌아온다. 

 

 


10

오수가 영이에게 위로를 돌려주다

 

 (병원에 입원한 영이와 오수가 대화하는 장면)

 

 

떠난다며? 떠나지. 왜 안떠났어. 앞이 보이는 너희들은 떠난다는 말이 늘 무기지. 앞 보는 내가 혼자 남아 어떤 생각을 할지는 상관없지. 너희들은.

...의사가 뭐래

 

..됐대.

 

내 예상이 맞았네.

 

수술하면 된대.

 

여섯살때도 사람들이 그랬어. 수술만 하면 돼. 항암치료 20번이면 돼. 다시 재발만 안되면 돼. 말은 참쉬워.

 

영이야. 안 괜찮아도 되니까 울래?

 

아니, 별로.

 


 

 

 

영은 두려움 앞에서 마음이 닫혀버렸기 때문에 위로를 거절한다. 그러나 오수가 영이의 곁에 가서 안아주며 손을 잡고 둘이 울면서 그들은 같이 치유받는다

 

사람은 자신이 베푼 것을 돌려받게 되어있다. 시간성은 짧을수도 있고 길수도 있으며, 그 형태는 달라질 수 있다. 자신에게 사랑을 베풀어 준 영이를 진심으로 대하게 된 수는 자신이 받은 치유의 말을 영이에게 그대로 돌려준다. 수는 지금까지 같이 울어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게 살아오지도 않았고 자신 내면에 깊게 뿌리박힌 상처 때문에 타인을 위해 울 여유가 없었다. 그런데 누군가 자신을 알아주고, 위로해주고, 너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주면서 수는 그 깊은 자기 혐오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는 놀랍게도 영에게 사랑을 돌려준다. 

 

 

그리고 이제부터 드라마는 본격적으로 영이의 두려움을 전면에 내세우고, 두려움을 피하려고 애를 쓰는 영과 수의 줄다리기가 시작된다. 수는 쉽게 물러서지 않는다. 사실 수술을 해야할지 말아야 할지 그것은 핵심적인 사항이 아닌지도 모른다. 현실에서는 수술을 하는게 꼭 더 좋거나 나쁘지는 않다. 드라마에서의 수술은 하나의 장치일 뿐이다. 수술을 다시 하게 된다는 건, 곧 영이 지난날의 트라우마를 치유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영은 또다시 외롭고 끔찍했던 그 과정을 겪기보단 죽는게 낫다고 생각한다. 영은 죽음보다 두려운 수술을 거부하고 죽음 앞에서 태연해보려고 하지만 그런 영을 수가 여지없이 뒤흔든다. 일말의 흔들림도 느끼지 않고 수는 강경하다. 어쩌면 사랑을 받은 수는 강해진 것일테다.  

 

 


10

영이가 회피애착을 갖게 된 순간과 죽음에 대한 태도

 

너 대단하다. 멋지다 진짜.

 

말투가 왜 그래.

 

예쁘고 착하고 쿨하고 머리좋고 돈 많고 게다가 죽음까지 두려워하지 않고. 이야진짜.

 

비꼬지 마.

 

참 재수없다 너.

내가 너보다 나은게 있어 딱 하나.

난 그 어떤 순간에도 살고싶어한다는 거야.

 

난 니가 날 이해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네.

죽고 싶었던 순간이 너도 있었다며. 그래서 약을 준비한 거라며.

 

오기지 그건. 그 약을 보면서 죽을 각오고 살자.

분명히 말하지만 난 늘 살고 싶어.

 

넌 살고 싶으면 살아지지만 난 살고 싶어해도 살 수 없어.

여섯 살때부터 준비한거야. 만약 언젠가 때가 오면 지금처럼 웃으면서 가야지. 구차하게 연연해 말아야지. 너랑 있는 이 순간도 너무 좋고 따뜻해도 연연해하지 말아야지. 그립지 말아야지. 단념하지 않으면 구차해질 뿐이니까 애원하지 말아야지. 여섯살때부터 준비한거야. 그러니까 날 흔들지마.

기대하게 하지마. 가자.

 

….중략

 

널 여기두고 혼자만 가려는거야.

넌 거짓말하는데 아주 재주가 없어. 넌 죽고 싶지 않아. 넌 살고 싶어. 니가 그걸 인정하는 순간 초라해지는게 겁날 뿐이지. 그런데 미안하게도 지금 니 모습이 난 더 초라하게 느껴져.

 

가지마.

나랑 같이 가. 같이 가.

 

죽는 순간까지 나랑 즐겁게? 이게 즐겁니 넌? 니 뜻대로 안 돼. 살고싶다고 말하지 않으면 이제 아무것도 니 뜻대로 되지 않을거야.

 

어디가 같이가. 이리와.

 


 

 

언제나 살고 싶었던 사람에게는(수),

죽음을 완벽히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말하는(영),

사람의 헛점이 더 잘 보이는가 보다.

 

영은 진심으로 죽고 싶어했을 거라고 난 생각한다. 오랫동안 두렵고 외롭고 보이지 않는 고립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에, 촉각을 곤두세워 사는 삶은 무척이나 피곤했으리라. 그런 삶을 계속 살고싶다, 고 말하기엔 20년의 세월은 결코 짧지 않다.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삶 속에서 사람들의 기대와 애정을 철저히 무시하고 연연해하지 않는 것이 유일한 생존방식이었던 사람에게, 죽음은 삶보다 편하게 느껴질 수 있다.

 

수는 버려졌지만 주위에는 (위험하더라도) 사람들이 언제나 많았다. 수는 자신의 타고나게 건강한 육체와 멘탈로 어려운 삶을 강인하게, 비웃으며 살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영은 정 반대의 삶을 살았다. 

 

양육강식의 법칙으로 보자면 영은 환경적으로는 상위포식자가 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육체적으로 무능력해졌으므로, 그녀는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작은 초식동물처럼 살아갔을 것이다. 발소리만 나도 겁을 먹는 눈이 큰 초식동물. 주위에 사자와 하이에나가 드글거리는 세상속에서 그녀가 삶을 택하기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삶을 상상해보라. 

 

수는 영이 '너무나도 이기적으로 선택'하는 것이라고 비난했지만, 사실 수도 몫지 않게 이기적인 의도로 영을 설득한 것이다. 수는 자신이 '살아야 할 이유'를 처음으로 영을 통해서 찾았다. 그런 영이 사라진다면 수는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잃게 된다. 누구나 자신의 가장 이기적인 욕심으로 타인을 설득한다. 그건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기 때문에 비난할 거리가 되진 않지만, 그로인해 자신의 운명이 바뀌는 것은 그래서 재미있는 우주의 장난이다. 그리고 그 장난으로 인해 자신의 뜻대로 항상 이루어지지 않는다. 삶이나 죽음마저도. 

 


대체 나한테 뭘 원해?

 

살고 싶다는 말.

살아야겠다는 의지.

 

그럼 뭐가 달라지는데. 난 살 수도 없는데. 니가 보고싶지 않냐고? 아니 보고 싶어. 니가 오고부터 난 매일 니가 그리워. 그럼 뭐해. 난 볼 수도 없는데. 나도 무서워 죽는게. 왜 날 이렇게 자꾸 약하게 만들어 넌. 왜 날 자꾸 살고 싶게 만들어 넌.

 

살고 싶어?

 

아니, 살고 싶지 않아.

 

(오수가 떠난다)

어디가? 어디가. , 가지마. 나랑 얘기해. 오빠!!! 가지마!! 오빠!!!!!

 


 

 

영이가 가장 두려워한 것은 사실 죽음이 아니라 버려짐이었다. 어린 시절 버려짐에 대한 트라우마가 그녀를 전형적인 회피애착이 되게 만들었다. 재미있게도 자신의 욕구에 누구보다 이기적인 수가 나타나, 그 부분을 캐치하고 궁지에 몬다. 수는 영리하고 독하다. 수는 자신의 간절한 바람(영의 생존)을 이루기 위해 상대방의 두려움(버려짐)을 어떻게 이용해야 할지 아는 사람이다. 수는 생존법칙과 인간의 욕구에 누구보다 도가 텄기 때문이다. 결국 수는 자신이 원하는 걸 얻어낸다. 영의 진심이야 어찌됐든, 수에게서 버려지는 두려움을 잠식시키기 위해, 수가 원하는 '살고 싶다'는 말을 해주고, 그 말을 함으로써 점점 더 생존에 대한 희망을 느낀다. ㅡ 실제로 웃고 싶지 않아도, 얼굴 근육을 웃게 만들면 긍정적인 에너지가 생성되는 것과도 같은 이치다ㅡ  수는 이걸 직감적으로 알았던 것이 아닐까. 

 

이 드라마를 보면 안락사로 논란이 많았던 '미 비포 유'가 생각난다. 그 영화에서는 결국 남자 주인공이 안락사를 선택한다. 게다가 자신이 죽는 것까지 옆에서 지켜봐 달라, 고 마지막까지 이기적인 부탁을 한다. 여자 주인공은 결국 상대방의 부탁을 들어준다. 자신이 처절하게 아프고 고통받을 시간이 있을것을 알지만, 여자 주인공은 남자에게 자신을 헌신한다. 그리고 그 헌신속에서 남자 주인공은 가장 편안한 죽음을 선물받는다. 

 

어쩌면 안락사에 대한 논란을 어떻게 처리하는가만 봐도 한국과 미국 정서의 차이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미국도 그 영화로 인해서 안락사에 대한 논란이 일어났다고 하지만 결말은 새드엔딩. '그 겨울, 바람이 분다'는 해피엔딩이다. 영은 마지막에 모든 걸 다 가진 사람이 된다. 눈을 뜨고 두려움을 이겨내고 주위 사람들에게 신뢰를 느끼고 모든 걸 용서하고 다시 수와 재회한다. 

 

 


 

11

무철형의 성장

 

(누나에게 상처치료받으면서)

 

수 동생 치료해.

 

안한다고 했지.

 

수가 어제 나한테 무릎을 꿇었어. 오수가.

나한테 어제처럼 무릎을 꿇었던 적이 딱 한번 더 있었지. 17살때. 나 희주 사랑하니까 형이 좀 빠져주라고 말하면서.

 

아주 쑈를 하네 미친놈들.

 

어제 알겠더라고. 왜 희주가 내가 아니고 오수였는지.

난 죽어도 내가 안버려지거든. 그게 사랑이든 부모든 누나든 죽음 앞에서든. 난 폼 안나는짓은 죽어도 못하거든. 근데 오수는 지를 버리지. 폼 같은거 구차한거 찌질한거 절대 겁을 안내. 희주가 오수한테 간다고 할때 내가 뭐라고 그랬는지 알아? 잘가. 잘살아. 행복해야 한다. 나 그런 놈이야. 폼 안나는 짓 못해. 오수는 사랑을 지킨다고 지를 버리는데 난 폼잡을라고 사랑도 잃고 치료시기도 놓치고. 누나 말대로 천벌을 받고 있지.


 

 

수가 무철형에게 가서 무릎을 꿇고 살려달라고 애원하고, 무철형이 누나에게 가서 치료해달라고 하는 장면은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한 사람의 사랑의 영향력은 한 사람에게만 귀결되지 않는다. 그것은 멀리 퍼져나가 아주 많은 사람을 살린다. 수와 영의 사랑은 주위 사람들 모두를 치유한다. 그리고 그게 진정한 사랑의 힘이 아닐까, 싶다. 

 

 


나까짓놈 때문에 세상이 별로라고 생각하지 않길 바래.

 

사람이 사람을 죽이면 죄가 얼마야?

 

글쎄. 법적으론 한 15년형?

 

세상에선 그게 젤 큰 죄겠지?

 

아마도.

 

그럼 니네 엄마가 널 버린 죄는?

아마도 그보단 작겠지?

니가 희주씰 버린 죄도 그보다 작을 테고.

니네 엄마가 널 한번이라도 찾아왔던 걸 기억하길 바래. 그리고 이제 그만 희주씨에 대한 죄책감에서 벗어나길 바라고. 니 자신을 오래 미워했잖아. 스스로도 지칠만큼.

사랑했어. 널 옆에 두고 사랑할 자신은 없지만, 니가 날 속인거 무죄야. 넌 살기 위한 방법이었고 난 행복할 때도 있었으니까.


 

 

이 대목을 보면서 엉뚱한데 생각이 미쳤다. 우리나라 형량은 너무 작다는 것. 

 

한편으로 저 대목을 보면서 공감이 많이 갔고 그런 마음이 충분히 생길 것임을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모 마리아'의 현현으로 대변되는 이상화는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깐 짚고 넘어가보면


분석심리학의 창시자, 융 이론에서는 남성 무의식의 여성화인 '아니마'의 단계(는 1~4단계가 있다)에서 성모 마리아로 대변되는 이미지는 의외로 최고 단계인 4단계가 아니라, 3단계라고 한다. 3단계에는 거룩하고 순수한 로망이 존재하고, 서양에서는 이미 이에 대한 부정적인 일들이 아주 많았던 것으로 이를 증명했다. 아니마의 숭고한 면을 성모 마리아에게서 찾기 시작하면서 아니마가 성처녀로서 완전히 긍정적인 상만을 부각하자, 부정적인 면들이 중세 '마녀신앙'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일방적인 지고지순성만을 보고 모방한다면 그만큼의 부정적인 그람자가 사람들 마음속에 생기게 된다. 빛으로만 이루어져도 우리는 살 수 없고 어둠만 있어도 살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래서 '아니마'는 3단계보다 더 성숙한 단계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4단계, '지혜'의 소피아로 대변된다.


그리고 드라마는 끝없는 이해와 용서로 상대방을 품으려하는 동안, 자신이 무너지고 있는 것을 놓쳐버린 영의 내면으로 절정을 터뜨린다. 타인을 이해하는 만큼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 그녀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16

죽고 싶어도 기대하는 마음

 

난 네가 용서가 안돼. 변명할게 없다는 네 말도 난 이해할 수 없어. 인정할 수 없지만 이게 내 수준이야. 네가 돈을 안가져갔다고 해도 모든 게 원점으로 돌아가진 않아.

 

알아.

 

네가 비디오에 한말처럼. 오늘이 우리가 끝이 아니라면 내가 수술이 끝나구 만약 그때도 내가 숨을 쉬고 살아있다면 우리  그때 만나 다시 얘기하자. 그땐 내가 묻는 모든 말에 넌 하나도 숨기지 말구 성실히 대답해줘야 할거야. 정말 네가 날 사랑하긴 한건지 만약 나를 사랑했다면 나를 사랑하면서 네 죄책감은 얼마나 컷는지 내가 받게 될 상처에 대해 정말 나만큼 가슴이 아팠는지. 그리구 우리 오빤 어느 산에, 어느 강에 뿌려졌는지. 넌 내가 묻는 그 모든 질문에 다 대답해야 할거야.

 

그래.

 

근데 네 모든 변명은 그렇게 나중으로 미루더라도 혹시 모르니까 나는 지금 너한테 하고 싶은 말은 해야겠다. 네가 가고 나는 너를 볼수가 없는데 네가 보고 싶은게 참 힘이 들드라. 나 역시 너처럼 너를 보낼때 끝이 아니었나봐. 끝을 내려던 그 순간에도 어쩌면 니가 달려올지도 모르는 기대감이 나한테 있었던 거 같애.

손목을 그을 때도 두려움보단 네가 혹시나 내 방문을 열지나 않을까 기대했어. 마치 단 한번도 죽고싶었던 마음이 없었던 것처럼.

(얼굴을 잡으며) 날봐. 너한텐 나는 아직 못한 얘기가 너무 많아. 하지만 오늘이 이게 너랑 끝은 아닌거 같아서…. 수술이 잘 끝나면 나중에 또 지금처럼 우리 얘기할 수 있겠지? 너랑 나.


 

영은 보살핌을 받지 못한, 버려짐에 대한 두려움에 의해 자신의 욕구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래서 상대방을 이해하고 용서하며 곁에 두려고 했다. 자신은 그럴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제대로 해소되지 못한 욕구는 무의식에 남아 그림자가 된다. 결국 모두를 떠나보내고 견딜 수 없는 공허함 앞에서 죽음에 한발짝 앞으로 다가간다. 또한 이로인해 모두가 자신곁으로 돌아오기를 바라기도 했다. 무의식은 그렇게 해서라도 사람들이 떠나지 않기를 바란 것이다. 

 

수가 권유했듯이 소리를 지르거나 분노라도 해서 내면의 두려움과 불안을 해소했어야 했다. 영은 그런것을 할줄 몰랐고 자신을 억누르는데 너무 오랫동안 모든 에너지를 사용해 왔기 때문에 통제하지 않는 것이 어색했다. 자신을 끝없이 통제하고 자신의 행복보다 상대방의 행복에 관대하고 이해하려는 성향은 결국 자신을 파괴했다. 그리고 무의식이 원한 대로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곁으로 돌아왔다. 자신을 파괴하고 아프게 함으로써 말이다. 

 

영이 조금 더 솔직했더라면 극단적으로 가는 것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너는 혼자 살 수 없어. 장애인이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누구도 혼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내가 네가 있어서 지금까지 산 것처럼. 수술 후 네가 눈을 다시 못 떠도 눈이 안보이는 것때문에 더는 마음 아프지 않길 바래. 그래도 미안해. 많이 미안해.

 

참 서툴러. 안는 것도. 

내가 왕비서님이 서툰방식으로라도 날 사랑했다는 걸 일찍 알았더라면 그렇게 외롭진 않았을 텐데. 


자신이 가장 증오하고 두려워한 사람을 용서하고, 껴안을 수 있게 된 영과 자신의 욕심을 내려놓을 줄 알게 된 왕비서님. 그들 마음의 틈 사이에도 사랑이 피어났다.

 

어쩌면 우리는 사랑하지 않아서 외로운 것이 아니라, 사랑이 완전해야 된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외로운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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