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atever you explore, it will lead you to your own path."

"당신이 탐구하는 모든 것이 결국 당신만의 길로 이끌 것이다."

작은 우주의 이야기/컨텐츠 파헤치기

[한드] 나의 아저씨

플라눌라 planula 2021. 2. 8.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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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격적일정도로 슬퍼서 여러번 보게 된 드라마, 나의 아저씨.

몇 장면을 돌려보자.  

 


 

박동훈 부장님은 파견직이라고 저한테 함부로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좋아했나?”

 

제가 누군가를 좋아하는게 어쩌면 지탄의 대상이 될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전 오늘 짤린다고 해도 처음으로 사람대접 받아봤고 어쩌면 내가 괜찮은 사람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게 해준 이 회사에, 박동훈 부장님께 감사할겁니다.”

 


 

이때부터 지안은 성장하기 시작했는지도 모르겠다.

한 사람의 정체성이 완전히 달라지기 시작하는 순간은 바로 '용기를 낼 때'의 전후로 나눠지는 것 같다.

 

사람들의 눈치를 보고 숨어다니고 자신의 행동과 삶과 가진 것과 환경과 그러니까 정체성이라 할만한 모든 것을 부정하면서 살던 지안이,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진 순간이다. 용기를 가질 수 있는 원동력은 '존중'이다. 존중은 같은 사람이 세상의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보느냐 부정적으로 보느냐'의 갈림길이라고 생각한다. 존중을 받아본 사람은 세상을 긍정한다. 자신의 삶을 긍정한다. 그러므로 자신의 존재를 긍정한다.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어딘가에서는 존중받고 또 어딘가에서는 존중받지 못한다. 예를 들어 가정에서 존중받지만, 회사에서는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당하면 그 사람은 +와 -의 그 어디쯤에서 혼란을 느끼고 감정의 파도를 타게 된다. +가 많아지면 점점 더 -를 이겨낼 힘을 갖게 되지만 반대가 되면 그 사람은 어둠의 세계를 더 편안하게 느끼게 된다. 반대의 경우도 있을 것이지만 드물다. 가정에서 존중받지 못한 사람은 회사에서도 존중받지 못하고 세계에서도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한다. 이 상황이 극단적으로 방치되면, 방황하고 그 상태를 견디지 못해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타인을 해치는 방식을 선택하기도 한다. 그들은 물리적 범죄를 저지르거나 소시오패스가 되거나 위로받지 못한 마음을 스스로 할퀴기 위해서 '잔인한 동영상'을 공유하거나 타인을 시기, 질투하여 험담하거나 비난하거나 악플을 단다.

 

나를 사랑해주는, 존중해주는 한 사람만 이 세상에 있어도 그 사람은 인간답게 살 수 있다고 한다. 

 

결국 가정은 모든 인간의 정체성과 인간성이 보듬어지는 가장 중요한 곳이다. 

 


 

사람만 죽인줄 알았지? 별 짓 다했지? 더할 수 있었는데. 그러게 누가 네 번 이상 잘해주래? 바보같이 아무한테나 잘해주고. 그러니까 당하고 살지.”

 

 

“……고맙다. 고마워.”

 

그지같은 내 인생 다 듣고도 내 편들어줘서 고마워. 고마워. 나 이제 죽었다 깨나도 행복해야겠다. , 나 불쌍해서 마음아파하는 꼴 못보겠고. 난 그런 너 불쌍해서 못보겠다. 너처럼 어린애가 어떻게……”

 

“…어떻게 나같은 어른이 불쌍해서나 그거 마음 아파서 못살겠다.”

 

내가 행복하게 사는 거 보여주지 못하면, 넌 계속 나때문에 마음아파할거고, 나 때문에 마음아파하는 너 생각하면 나도 마음아파 못살거고. 그러니까 봐, ? , 내가 어떻게 행복하게 사는가 꼭 봐. 다 아무것도 아니야. 쪽팔린거? 인생망가졌다고 사람들이 수군거리는거? 다 아무것도 아니야. 행복하게 살 수 있어. 나 안망가져. 행복할거야. 행복할게.”

 

아저씨가, 정말로행복했으면 했어요.”

 

. 행복할게.”

 


 

 

인간이 망가지는 과정을 살펴보면,

기대 - 실망이 계속되다, 결국 일말의 기대 - 실망 - 포기의 단계로 가는 것 같다. 이 마지막과정에서 인간이 '자신이기를 완전히 포기'하기 전에 누군가가 손을 내밀어주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것은 하나의 기적이고 행운이다. 드라마속의 지안도 운이 좋은 것이다. 태어난 환경은 불행했으나 그 환경을 극적으로 뒤집어버릴 수 있을만큼의 따스함과 존중을 모든 사람들이 받는 것은 아니다. 물론 처음부터 좋은 환경에서 태어나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일어난 일이고 내 힘으로 바꿀 수 없는 일이므로, 이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삶에서 가장 중요하면서도 힘든 일이 될 것이다. 

 

 포기의 단계로 가는 사람에 대해 세상은 너무나 쉽게 비난한다. 물론 자신의 의지와 힘으로 그 모든 것을 이겨내는 것은 훌륭하다. 하지만 그것은 자연스러운 과정이라기보다는 초인적인 힘을 통해 극복해내는 소수의 사람들의 이야기일 뿐이다. 인간은 초인적인 힘으로 자신이 받아온 무의식과 본능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가졌기에, 다른 동물과 구분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인간답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는 의무를 갖고 태어났다. 모든 사람들이 훌륭해질 수는 없겠지만,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 사람이 훌륭하든 그렇지 않든 우리는 그 사람의 현재에 대해 쉽게 비난할 자격이 없다. 그 사람을 이룬 수 많은 환경과 변수와 불행에 대해 타인이 평가하는 것은 얼마나 무책임하고 위선적인 일인가. 

 

 누군가 포기의 단계로 가고 있다면, 그 사람을 평가하고 비난하기 보다는 '존중'해주자. 그것만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며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눌 수 있는 길이다. 이 길이 쉽지는 않다. 이로 인해 자신이 위험에 처할수도 있고 손해를 볼 수도 있다. 또한 내적인 가치평가 없이 인간적으로 연민을 가진 다는 것은 어렵다. 그러므로 훌륭하다. (내적인 가치평가를 무의식적으로 내리며 연민한다는 것은 '불쌍하게 여기거나 자신보다 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어떻게 들어요. 내가 몰래 듣고 있는거 다 아는데. 진짜내가 안미운가?”

 

"사람 알아버리면, 그 사람 알아버리면 그 사람이 무슨 짓을 해도 상관없어. 내가 널 알아.”

 

아저씨 소리 다 좋았어요. 아저씨 말, 생각, 발소리, .”

사람이 뭔지, 처음 본 것 같았어요.”

 


 

내가 이 드라마에 심취해있을 때, 지인과 이야기를 나눈적이 있다.

 

지안의 인생에 대해 마음아파하거나 이해할거라 생각한 것과 달리, 지인은 그녀의 삶이 너무 과장되었다고 비난했다. 그녀는 박동훈 부장 역시 그것은 일종의 '불륜'이 아니냐며 힐란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꽤 큰 충격을 받았다. 드라마가 원하는 대로 봐주지 않는 것은 자신의 권리이지만, 완벽하게 자신의 관점에서만 이해하는 사람을 보며 신선하기도 했다. 신혼부부인 그녀에게 박동훈 부장은 불륜을 저지르는 중년의 남자이고 분노해야 할 대상일 뿐이었다. 그가 베푼 선의는 '잘못된' 것이며 지안은 그러니까 박동훈 부장을 꼬드긴 못된 소녀였던 것이다. 

 

나는 이 대화를 통해 이래서 세상에 싸움은 끊이지 않으며, 서로를 믿는 것은 어렵고, '자신의 입장'이라는 것은 얼마나 '이기적'인지 깨달았다. 그녀가 무조건 잘못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의 입장은 나름대로 새로운 시선이었으며 장점과 단점이 있었다. 누구를 주인공으로 하느냐에 따라 관점은 완전히 달라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며 또 어렵기도 하다. 또 이런 관점도 존재하기 때문에 세상의 수 많은 박동훈 부장은 진실된 선의라고 할지라도 오해가 생길 수 있고, 그녀 말대로 현실에서는 진실된 선의가 아닌경우도 (실제로) 많을 것이다.

 

사람들은 거의 인지하지 못하지만 각자의 필터로만 세상을 본다. 그 필터속에 있을 때 그건은 '완벽한 진실'이며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입장을 옹호해야 하고, 옹호받지 못하면 억울해지고. 이해관계는 충돌한다. 

 

 

수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는 '위선'을 저지르면서 선의라고 착각하곤 한다. 그들은 자신이 하는 행동을 상대방이 어떻게 느낄지에 대해 모른다. 이런 사람을 만나면 답이 없다. 그들은 자신을 속이고 상대방도 속이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를 눈치채지 못한 상대방은 그것이 선의라고 믿고 자신이 점점 파괴되는 것을 모른다. 위선은 대놓고 총을 겨누는 것보다 더 위험할 수도 있다. 위선에 침식된 자는 자신의 욕구를 인정할 줄 모른다. 자신의 욕구를 숨기고 '해야 한다'에 집중한다. 이를 통해 자신의 열등감을 보상받고 자신이 더 나은 사람이라고 느낀다. 그러나 이것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휴화산이다. 그들의 분노는 언제든 터질 수 있으며 결국 자신의 진짜 모습을 보는 순간, 스스로도 견디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 

 

이런 극적인 상황까지 내몰리지 않으려면 선의와 자신의 욕구에 균형을 잘 잡아야 한다. 자신의 욕구만을 우선시 하는 사람은 이기적이고 타인의 상황에 공감하지 못한다. 반대로 선의만을 우선시하는 사람은 자신이 그려놓은 이상적인 모습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다 자신을 속이기 쉽다. 

 

개인적으로는 한국사회에서 드라마 '나의 아저씨'는 역기능보다 순기능이 더 많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욕구를 극단적으로 드러내고 타인을 파괴하려는 욕망이 파국으로 치닫는 '막장 드라마'는 굉장히 많지만, 내가 겪어보지 못한 상황에 놓인 사람을 연민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을 잘 그린 드라마는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종종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볼 필요가 있다.

 

 


 

당신은 존중받으면서 살고 있습니까?

 

당신은 스스로를 존중하나요?

 

당신은 (직업, 성격, 외모, 돈, 명예, 인기 등의) 편견 없이

타인을 인간적으로 존중해본 적이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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