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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죽은 것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이 모든 것에는 많은 우연이 개입한다. 그리고 우리의 죽음이라는 두 번째 우연은 첫 번째 우연의 은총을 오래 기다리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나는 켈트족의 신앙이 아주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그 신앙에 따르면 우리가 잃어버린 영혼은 어떤 열등한 존재나 동물, 식물 혹은 무생물 속에 갇혀 있어, 우리가 우연히 나무 곁을 지나가거나, 그 영혼의 감옥인 물건을 손에 넣는 날까지는 ㅡ 많은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일은 아니지만 ㅡ 우리에게는 잃어버린 존재가 된다. 그러다 그날이 오면 영혼은 전율하고 우리를 부르며, 우리가 그것을 알아보는 순간 마법이 풀린다고 한다. 우리 덕분에 해방된 영혼은 죽음을 정복하고, 우리와 더불어 살기 위해 돌아온다.
우리 과거도 마찬가지다. 지나가 버린 과거를 되살리려는 노력은 헛된 일이며, 모든 지성의 노력도 불필요하다. 과거는 우리 지성의 영역 밖에, 그 힘이 미치지 않는 곳에, 우리가 전혀 생각도 해 보지 못한 어떤 물질적 대상 안에(또는 그 대상이 우리에게 주는 감각 안에) 숨어 있다. 이러한 대상을 우리가 죽기 전에 만나거나 만나지 못하는 것은 순전히 우연에 달렸다.
이처럼 콩브레에서 내 잠자리의 비극과 무대 외에 다른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 지도 오랜 어느 겨울 날, 집에 돌아온 내가 추워하는 걸 본 어머니께서는 평소 내 습관과는 달리 홍차를 마시지 않겠느냐고 제안하셨다. 처음에는 싫다고 했지만 왠지 마음이 바뀌었다. 어머니는 사람을 시켜 생자크라는 조가비 모양의, 가느라한 홈이 팬 틀에 넣어 만든 '프티트 마들렌'이라는 짧고 통통한 과자를 사 오게 하셨다.
Petite Madeleine. 프루스트가 마들렌 과자를 추억의 매개물로 택한 것은 일찍뿌터 많은 주목을 받아 왔다. 특히 그의 미발표작 '생트 뵈브에 반하여'에서는 딱딱한 토스트인 '비스코드'를 택했다가 '스완네 집 쪽으로'에서는 마들렌으로 바꾼 것에 대해 르죈은 "프루스트 회상의 배경에는 항상 어머니가 자리한다."라고 말한다. 즉 마들렌은 보통명사로는 과자를 의미하지만 고유명사로는 성녀 마들렌을 가리키는 단어로, 마들렌은 창녀이자 예수님의 부활을 처음으로 목격한 성녀다. 이와 같은 마들렌의 양가성은 바로 어머니에 대한 어린 마르셀의 감정을 구현하는 것으로, 이 문단에서 보통 명사인 '작은 마들렌'을 고유 명사화하여 대문자로 Petite Madeleine으로 표기한 것은 그 이미가 단순한 '과자'로 고갈되지 않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마들렌 모양이 조가비 같다는 묘사는 접힌 주름이 펼쳐진다는 점에서 기억에 의한 과거의 부활을, 환유적으로는 콩브레 사람들의 독실한 신앙심을(접힌 주름plie이라는 단어에는 '복종하다'라는 의미가 있다)표상하기도 한다.
침울했던 하루와 서글픈 내일에 대한 전망으로 마음이 울적해진 나는 마들렌 조각이 녹아든 홍차 한 숟가락을 기계적으로 입술로 가져갔다. 그런데 과자 조각이 섞인 홍차 한 모금이 내 입천장에 닿는 순간, 나는 깜짝 놀라 내 몸속에서 뭔가 특별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어떤 감미로운 기쁨이 나를 사로잡으며 고립시켰다. 이 기쁨은 마치 사랑이 그러하듯 귀중한 본질로 나를 채우면서 삶의 변전에 무관심하게 만들었고, 삶의 재난을 무해한 것으로, 그 짧음을 착각으로 여기게 했다. 아니, 그 본질은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었다. 나는 더 이상 나 자신이 초라하고 우연적이고 죽어야만 하는 존재라고 느끼지 않게 되었다. 도대체 이 강렬한 기쁨은 어디서 온 것일까? 나는 그 기쁨이 홍차와 과자 맛과 관련 있으면서도 그 맛을 훨씬 넘어섰으므로 맛과는 같은 성질일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 기쁨은 어디서 온 것일까?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어디서 그것을 포착해야 할까?
두 번째 모금을 마셨다. 첫 번째 모금이 가져다준 것 외에 다른 것은 아무것도 가져다주지 못했다. 세 번째 모금은 두 번째보다 못했다. 멈춰야 할 때다. 차의 호력이 줄어든 것 같았다. 내가 찾는 진실은 차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안에 있는 것이 분명하다. 차가 내 속에 있는 진실을 일깨웠지만, 그 진실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한 채 점점 힘이 빠져 가면서 무한히 같은 증언만을 되풀이할 뿐이지만, 내가 지금은 이 증언을 해석할 줄 모르나 나중에 결정적인 해명을 위해 내가 요구하면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도록, 적어도 온전한 상태로 되찾을 수 있기를 바랐다. 나는 찻잔을 내려놓고 정신 쪽으로 향한다. 정신이 진실을 발견해야 한다. 그러나 어떻게?
매번 정신은 스스로를 넘어서는 어떤 문제에 직면할 때마다 심각한 불안감을 느낀다. 정신이라는 탐색자는 자기 지식이 아무 소용없는 어두운 고장에서 찾아야만 한다. 찾는다고? 그뿐만이 아니다. 창조해야 한다. 정신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 오로지 정신만이 실현할 수 있고 그리하여 자신의 빛 속으로 들어오게 할 수 있는, 그 어떤 것과 마주하고 있다.
나는 도대체 이 알 수 없는 상태가 무엇인지 아무런 논리적인 증거도 대지 못하지만, 다른 모든 것들이 그 앞에서 사라지는 그런 명백한 행복감과 현실감을 가져다주는 이 상태가 무엇인지 물어보기 시작한다. 그것을 다시 나타나게 하고 싶다. 생각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 차의 첫 모금을 마신 순간으로 되돌아가 본다. 똑같은 상태가 보이지만 새로운 빛은 없다. 나는 정신에게, 사라져 가는 감각을 붙잡을 수 있도록 좀 더 노력해 달라고 부탁한다. 그래서 그 감각을 다시 포착하려고 애쓰는 정신의 열정을 깨뜨리지 않도록 온갖 장애물과 잡념을 물리치고 옆방에서 들리는 소음에 귀를 막고 주의력을 보호한다. 그러나 정신이 뜻을 이루지 못하고 피곤해하는 것을 느끼짜, 나는 반대로 정신에게 지금까지 거부해 왔던 기분전환을 하거나 다른 것을 생각하면서 최후의 시도에 앞서 기운을 차릴 것을 요구한다.
그런 다음 두 번째로 나는 정신 앞에서 모든 것을 비우고, 아직도 생생한 그 첫 번째 모금의 맛을 정신 앞에 내민다. 그러자 내 안에서 무엇인가가 꿈틀하며 위로 올라오려고 움직이는 것을 느낀다. 마치 깊은 심연에 닻을 내린 그 어떤 것이 올라오는 것 같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지만, 그것은 천천히 위로 올라온다. 나는 그 저항을 느낀다. 그것이 통과하는 거대한 공간의 울림이 들려온다.
분명히 내 마음 깊은 곳에서 팔딱거리는 것은 그 맛과 연결되어 맛의 뒤를 따라 내게로까지 올라오려고 애쓰는 이미지, 시각적인 추억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도 멀리서 너무도 희미하게 몸부림치고 있어, 내가 알아볼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휘저어 놓은 색채들의 포착할 수 없는 소용돌이가 뒤섞인, 어렴풋한 그림자일 뿐이다. 그러나 형태를 분간할 수 없는 나는 그 그림자를 향해 마치 유일한 번역가에게라도 말하듯이, 그것과 동시에 태어나 그것과 떨어질 수 없는 동반자인 미각이 들려주는 증언을 번역해 달라고 부탁할 수도 없으며, 그것이 내 지나간 과거의 어떤 특별한 상황이나 어떤 시기와 관련 있는지 알려 달라고 요청할 수도 없다.
이 추억, 동일한 순간의 견인력이 아주 멀리서 찾아와 내 깊숙한 곳으로부터 부추기고 움직이고 끌어올리려 하고 있는 이 옛 순간이, 내 선명한 의식의 표면에까지 이를 수 있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이제는 더 이상 아무것도 느낄 수 없다. 그것은 멈추었고 다시 가라앉은 모양이다. 그것이 언제 또다시 어둠 속에서 솟아오를지 누가 알 수 있단 말인가? 열 번도 더 다시 시작해보고 그쪽으로 몸을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온갖 어려운 일이나 중요한 일이 있을 떄마다 고개를 돌리게 하는 저 비겁함이 이 모든 것을 그만두고 차나 마시며 별 고통 없이 되씹을 수 있는 오늘의 권태나 내일의 욕망만을 생각하라고 권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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